2022.11.14
음악사진의 기원
기원(起源)이라고 하면 거대한 주제처럼 들리겠지만 실은 개인적인 이야기이며 사진보다 음악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모든 음악은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선형적인 구조를 가진다. 그런데 음악의 미덕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들을 수 있고, 피아노 연주의 왼손 도약처럼 반복을 통해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고, 새로운 소리(意圖)를 발견해 아름다움을 확장하는 것에 있다. 오래된 사진을 다시 꺼내 볼 때도 비슷한 감정이 생긴다. 이 사진집도 몇 년 전의 일을 순서대로 정리해 그 동기를 재발견하는 목적으로 시작한 일이다.
모든 것이 지금보다 단순했던 시절 텔레비전 채널은 일정 시간만 송출했다. 아침에 애국가로 시작해 새벽 1시가 되면 다음 날 편성 시간과 화면조정으로 전환되었다. 그때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 시간에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은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Vocalise)였다. 나는 너무 어려서 무슨 음악인지도 몰랐지만, 멜로디가 주는 심상은 아직도 선명하다. 알 수 없는 아련함이 느껴져 어린 나이에 한숨 비슷한 걸 내 쉬었다. 새벽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화장대 위에 올라가 달빛에 빛나는 설경(雪景)을 보고 있으면 자연과 음악의 결합은 어쩌면 나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 이런 슬픈 음악을 새벽에 사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나이테 각인처럼 매년 2월이 되면 잠을 잘 못 이루는 시기가 어김없이 찾아온다. 나에겐 이 반복이 일종의 정신적 화면조정 시간에 가깝다.
시골집에는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Le Fifre)이 인쇄된 LP 세트가 있었다. 어렵게 돈을 모아 오디오를 장만한 아버지는 그 음반에 담긴 음악을 들려주셨다.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라벨, 드뷔시… 내가 살았던 곳은 드넓은 대지였다. 노을이 아름다운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다. 땅끝과 하늘이 맞닿은 곳에 불빛은 악보의 음표 같았고 들판에 불던 바람은 누군가의 목소리 같았다. 이 책의 표지 사진이 연주자나 악기가 아닌 고향의 풍경 사진인 이유도 개인적인 음악 역사의 추억을 기원(祈願)하기 위해서다.
JTBC에서 근무할 때 내 전공과는 상관없는 ’고전적 하루’라는 이름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클래식 음악 담당 김호정 기자와 이야기하다 의기투합해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다들 본업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었지만 잘 모르니까 용감한 시도를 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고전적 하루를 통해 한국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만들고 있는 음악가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때부터 사진을 찍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혼자 카메라 셔터를 눌렀던 것 같다.
세상엔 수많은 예술 장르가 있음에도 우리 영혼의 마지막 빈 곳을 채우는 것은 언제나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음악 안에서 발견할만한 주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클래식 음악을 반복적으로 듣는 행위는 습관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요즘의 시대엔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진보적 결과물이 어쩔 수 없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조건 앞으로 나가는 것만 의미를 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반복과 해석의 존재다. 같은 곡이지만 반복의 과정에서 화학작용이 일어나 알맞은 크기로 전해지는 ‘마음의 보상’ 같은 것이다.
“저는 200년 전 음악을 듣고 있어요~” 생각해 보면 너무나 신기한 일 아닌가.
올여름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그녀의 친구들이 기획한 ‘고잉홈 프로젝트 (Going Home Project)’는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다. 손열음은 훌륭한 연주자지만 동시에 대담한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기획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수많은 연주 일정을 소화하며 습관처럼 말했던 바람을 (세계에 진출한 연주자들을 구성해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것) 실현하던 순간이다. 그즈음 나의 몸과 정신은 극도로 피폐해져 심각한 위기감이 있었다. 그래서 음악이나 들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공연장에 놀러 가 매일 연주를 듣고 공연과정을 지켜보면서 점차 내면의 에너지를 회복했던 것 같다.
공연 일정의 마지막 날 부르크너(Anton Bruckner) 교향곡 6번의 2악장(II. Adagio: Sehr feierlich)의 아름다운 소멸과 함께 마침내 자연스러운 결심이 생겼다. 지난 5년간의 사진을 정리해 사진집을 만들고 싶은 열망이 생긴 것이다. 그동안 누군가 나의 취미를 물어보면 무엇인지 답하기 어려웠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이 들었고 알 수 없는 ‘모호한 동기’만 있다가 허무하게 사라지곤 했기 때문이다.
매일 퇴근 후 운동을 마치고 사진을 꺼내서 정리하고 편집을 시작했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사진 작품이 아니라 기록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의 의지대로 배열하고 싶었다.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한정판으로 제작했다. 여름에서 초겨울을 지나는 동안 매일 밤 연주자들이 만들어준 아름다운 장면을 다시 떠올린 시간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결과물을 주위의 고마운 분들에게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드디어 반년의 가까운 작업 끝에 나의 첫 번째 사진집을 마감한다. 나의 첫 음표(♪)다. 이 결심을 통해 작곡가와 연주자를 계속 만나길 기대한다. 앞으로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담을 기회를 얻는다면 나에겐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겠지.
이 모든 여정 속에 김호정 기자와 고전적 하루를 통해 만났던 따듯한 인연에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